[어깨동무톡] 평화적 시각에서 재해석한 남북 관계사 - 휴전선을 밟고 : 제2차 남북정상회담

  • 날짜 : 2017-11-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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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선을 밟고 : 제2차 남북정상회담

 

정영철 




1945년의 38선, 그리고 한국전쟁 이후 휴전선이 그어진 후, 남북을 통틀어서 군 최고책임자가 이 선을 밟은 적이 있을까? 군 최고책임자가 이 선을 넘는다는 의미는 무엇일까? 그것은 남북이 더 이상 무력을 통한 적대적 관계를 지속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닐까? 바로, 2007년 10월 노무현 대통령은 비행기도 아닌, 그리고 자동차 속에서도 아닌 직접 걸어서 이 선을 넘었다. 분단 이후, 남의 최고 통치자-군 최고책임자가 직접 이 선을 넘어, 평양으로의 길을 걸었다. 그렇게 제2차 정상회담은 시작되었다. 2000년 제1차 정상회담 이후 만들어진 새로운 길 위에 한반도의 평화와 협력의 더 큰 길을 내기 위해 제2차 정상회담의 길은 그렇게 열렸다. 

 

 

2000년 정상회담 이후, 남북은 새로운 길을 열었다. 지금까지의 적대와 갈등의 시대를 마감하고, 남북이 손을 잡고 화해와 협력의 새 시대를 열기로 한 것이다. 

 

 

그러나 2002년 이후부터 남북관계는 위기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2002년 월드컵 3-4위전(한국 대 터키)이 열리는 날 서해에서는 남북의 함정이 충돌하는 제2차 서해교전이 발생했다. 가장 큰 문제는 미국의 부시 행정부가 등장하면서 북미간의 대립이 강화되고, 한반도에 다시금 전쟁의 위기가 드리워지기 시작했다. 특히, 새로이 출범한 미국의 부시 행정부와 북한과의 대립은 2002년 제임스 켈리 미 특사의 방북와 북한의 고농축우라늄(HEU)에 기반한 핵무기 제조 의혹 등으로 제2차 북핵위기가 시작되었다. 2차 핵위기는 남북의 화해와 협력에도 영향을 미쳤고, 북한과 미국의 핵을 둘러싼 갈등이 격화되면서 1994년 북미가 합의한 제네바 합의는 끝내 파기되고 말았다. 결국 북한은 영변 핵시설의 재가동으로 맞섰고, 2003년 1월에는 NPT 탈퇴를 선언하였다. 북미간의 대립이 더욱 격화되었다. 

 

 

북미간의 대립만 격화된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 내부에서도 그간의 대북정책을 놓고 갈등이 커져가고 있었다. 특히, 2003년 대북송금 특검법이 공표되면서 ‘남남갈등’만이 아니라 남북간의 화해와 협력에도 빨간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남북의 화해와 협력을 위한 길에서 현대 그룹의 대북 사업에 대한 편의를 봐준 혐의가 특검의 대상이 된 것은 결국 스스로의 발등을 찍는 것에 다름 아니었다. 특히, 특검은 남북간 화해의 노력과 이를 위해 노력한 수 많은 사람들을 좌절하게 한 사건이었다. 실제로 특검으로 인해 소떼 방북의 역사적인 이벤트를 성사시킨 정주영 명예회장과 정몽헌 회장이 검찰에 불려가는 신세가 되었고, 끝내 정몽헌 회장은 검찰 수사 와중에 자살하는 비극이 일어나기도 했다. 

 

 

남북간의 갈등도 작지 않았다. 2004년 김일성 주석 10주기 조문관련 갈등이 발생하였고, 결국 2004년 7월에는 남북간 당국자 대화가 중단되었다. 때마침 동남아를 경유하여 탈북자들이 대거 입국하면서 남북의 갈등은 심각한 상황으로까지 치달았다. 여기에 북미간 갈등이 6자회담으로 어느 정도 봉합되는가 했지만, 결국 2005년 2월 북한의 핵무기 보유 성명으로 인해 한반도 전체가 긴장국면으로 흘러갔다. 2004년 하반기부터 2005년 상반기까지는 민간차원의 대화와 협력은 지속되었지만, 정부차원의 공식적인 회담은 중단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교착상태는 2005년 6월 당시 정동영 통일부 장관이 6.15 민족통일대축전에 참가하여, 대통령 특사 자격으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면담을 하면서 풀리게 되었다.     

 

 

결국 노무현 정부 시절 남북의 협력을 더 높은 수준에서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한반도의 평화문제에 대해 뭔가 해결의 전기를 마련하는 수밖에 없었다. 이는 지금까지 기능주의적 접근에 따라 평화-안보 문제에 대해서는 뒤로 미루거나, 남북간에 합의와 실행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못했던 상황에서의 변화를 의미했다. 그리고 이러한 한반도의 평화-안보 문제는 남북의 합의만으로 해결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마침 2005년 ‘9.19 공동선언’에 따라 북미간 핵 갈등 해결의 전기가 어느 정도 마련되고 - 이는 곧바로 BDA 사태로 인해 위기로 바뀌었다 - 2006년에는 미국 부시 대통령이 한반도의 ‘종전선언’의 가능성을 밝히기도 하였다. 2006년에는 6자회담에서 BDA 사태로 좌초 위기에 빠졌던 9.19 공동성명을 되살리는 베이징 ‘2.13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우리 정부는 한미 정상회담을 통해 미국이 제시한 종전선언의 가능성을 다시 한 번 확인하고, 한반도 평화 - 비핵화를 포함한 - 그리고 경제협력의 더 높은 수준으로의 발전 등을 포함하는 새로운 협상을 북한과 시도하게 되었다.    

 

 

마침내 2007년 8월 5일 남북간에 정상회담이 비공개적으로 합의되었다. 그리고 8일에는 8월 28일 제2차 정상회담 개최에 합의했다는 내용이 공식적으로 발표되었다. 당시 청와대는 2차 정상회담 합의를 발표하면서 “북핵문제 해결과 남북관계 발전을 동시에 견인할 수 있는 계기”가 될 것이라고 하였고, “양 정상이 한반도 평화정착 문제를 허심탄회하게 논의함으로써 군사적 신뢰구축 조치가 확대되고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발판이 마련될 수 있다는 데 의미가 있”으며, “남북경협 및 교류협력 관계를 양적ㆍ질적으로 한 단계 진전시킬 수 있는 새로운 한반도 구상을 논의하여 다음 정부에서도 상생의 화해ㆍ협력 기조가 지속되어 나갈 수 있는 확고한 기반을 조성하는 데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고 발표하였다. 결국 제2차 정상회담은 그 주요 의제로 한반도의 ‘평화와 발전’을 제기하였고, 실제 2차 정상회담은 그런 방향으로 진행이 되었다. 

 

 

제2차 정상회담을 위한 평양행을 선택하는데 노무현 대통령은 걸어서 육로로 방북할 것을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10월 2일 청와대를 출발하여, 도라산 남북출입사무소를 거쳐, 군사분계선(MDL)을 걸어서 통과하여, 개성-평양 고속도를 따라 평양에 도착하는 일정으로 진행되었다. 역사상 처음으로 남의 최고책임자-군최고통수권자가 걸어서 군사분계선을 넘는 역사적인 장면을 만들어낸 것이다. 

 

 


​▲ MDL 통과장면 ▲ 

 


노무현 대통령이 군사분계선을 넘은 시간은 2007년 10월 2일 오전 9시 5분이었다. 사실, 군사분계선이라고 하지만, 표식이 없다면 아무도 알 수 없는 무형의 경계일 뿐이다. 과거 백범 김구 선생님이 38선을 넘을 당시가 1948년 4월, 그때로부터 거의 60년이 지나서야 이제는 38선이 아닌 군사분계선을 남의 정치지도자가 넘어서게 된 셈이다. 남의 최고지도자가 군사분계선을 걸어서 넘었다는 의미는 더 이상 한반도가 전쟁이 아닌 평화, 갈등이 아닌 협력의 시대로 넘어갔음을 알리는 것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이 선을 넘기 직전 국민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남겼다. 

 

 

국민 여러분, 오늘 중요한 일을 하러 가는 날이라서 가슴이 무척 설레는 날입니다. 그런데 오늘 이 자리에 선 심경이 착잡합니다. 눈에 보이는 것은 아무 것도 없는데, 여기 있는 이 선이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민족을 갈라 놓고 있는 장벽입니다. 이 장벽 때문에 우리 국민들은, 우리 민족은 너무 많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발전이 정지돼 왔습니다.

 

다행히 그동안 여러 사람들이 수고해서 이 선을 넘어가고 또 넘어왔습니다. 저는 이번에 대통령으로서 이 금단의 선을 넘어갑니다. 제가 다녀오면 또 더 많은 사람들이 다녀오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마침내 이 금단의 선도 점차 지워질 것입니다. 장벽은 무너질 것입니다. 저의 이번 걸음이 금단의 벽을 허물고 민족의 고통을 해소하고, 고통을 넘어서서 평화와 번영의 길로 가는 그런 계기가 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국민 여러분 성공적으로 일을 마치고 돌아올 수 있도록 함께 기도해 주십시오. 잘 다녀오겠습니다. 

군사분계선 걸어서 통과하기 전 2007. 10. 2

 

 

군사분계선을 통과한 노무현 대통령 일행은 인민문화궁전에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영접을 받았고, 이후 정상회담을 개최하여 역사적인 ‘10.4 정상선언(남북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 발표하였다. ‘10.4 선언’에는 ‘6.15 공동선언’에서는 언급되지 못했던 평화의 문제 특히, 한반도의 전쟁상태를 끝내기 위한 종전선언의 문제, 나아가 평화체제의 문제까지 언급되고 합의되었다. 또한, 남북관계의 발전을 위해 개성공단을 뛰어넘는 남북간의 경제협력의 문제가 다방면에 걸쳐 합의되었다. 이 외에도 그간 남북 관계 개선의 발목을 잡아왔던 서해해상에서의 남북 충돌을 방지하고, 오히려 ‘갈등의 바다’를 ‘협력의 바다’로 만들어 낼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창설에 합의하였다. 

 

 


​▲ 서해 평화협력 특별지대 ▲ 

 

 

예상을 뛰어넘는 풍성한 합의였다. 이렇게 되면 한반도는 평화체제의 길로 한걸음 더 다가갈 수 있었고, 남북의 협력은 보다 높은 수준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말 그대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예고하는 합의문이었다. 땅에 그어놓은 군사분계선을 넘었지만, 그 효과는 남북의 모든 장벽을 넘어뜨릴 수도 있는 합의문이었다. 

 

 

안타깝게도 ‘10.4 정상선언’은 합의문에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좌초할 운명이었다. 정상회담 이후, 남에서 벌어진 일련의 상황 즉, 17대 대선에서 이명박 후보가 승리하면서 ‘10.4 정상선언’을 이끌어갈 만한 추동력을 상실하고 말았다. 사실, ‘10.4 선언’의 합의 내용은 남북의 협력체제가 전제되지 않는 한 하나도 실행될 수 없는 것이었다. 한반도 평화체제의 문제는 북과 미국이 핵심 축을 이루는 문제였고, 이를 추동하기 위해서는 남북의 협력이 전제되어야 했다. 또한, 남북의 경제협력 사업 역시 남북의 정치적 협력이 지속되어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더욱이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는 남북의 정치 및 군사적 협력이 전제되어야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처럼 훌륭한 합의에도 불구하고 이를 실행할 수 있는 남측의 동력이 상실되면서 아무것도 추진할 수가 없었다. 오히려 그 이후의 역사가 증명하듯이, 남북관계는 6.15 공동선언 이전의 상태로 회귀하였고, 서해상에서는 천안함 사건과 연평도 포격 사건 등 남북관계를 결정적으로 악화시킨 사건이 연이어 터져나왔다. 또한, 군사분계선 상에서의 상호 비방과 총격도 벌어지면서 한반도는 다시금 갈등과 대립의 장벽이 높아져갔다. 

 

 

2007년의 제2차 정상회담은 남의 최고통치자가 군사분계선을 직접 걸어서 넘어가는 파격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지만, 그리고 그 합의 내용 역시 예상을 뛰어넘는 풍성한 성과를 거두었지만, 실제로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도대체 왜? 이런 일이 벌어졌을까? 첫째, 현실적으로 정상회담의 추진과 성사가 너무 늦었다. 2000년 정상회담 이후, 남북관계가 발전하는 과정에서 당연히 추진되어야 할 한반도 평화의 문제를 제기하고 성과를 내기 위해서는 더 이른 시기에 정상회담이 추진되고, 합의되고, 실행되어야 했다. 둘째, 지극히 현실 정치적 입장에서 남북관계에 대해 전혀 다른 철학을 가진 정치세력이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더 이상의 관계 개선의 추동력을 얻을 수가 없었다. 그리고 이는 미국의 강경정책에 부응하는 ‘한미동맹’체제가 강화됨으로써 한반도에서 사그라질 듯 보였던 냉전의 대립이 더욱 강화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휴전선을 밟고 밟아, 선을 지우고 길을 내기 위한 노력은 아쉽게도 원했던 것만큼의 결실을 맺지는 못했다. 그럼에도 선을 밟고 밟아, 길을 내기 위한 커다란 발걸음은 역사의 기록으로 남아있고, 앞으로 언제든 그 길을 다시금 걸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남겨주었다. 그것이 2007년의 정상회담이 남겨준 가장 큰 성과일 것이다. 그리고 또 하나 2007년의 정상회담이 남겨준 가장 큰 교훈은 남북관계의 개선을 위해서는 남이든 북이든 정책의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다른 어떤 곳보다도 우리의 정치가 민주주의의 원칙과 내용에 따라 발전해야 한다는 점이다.

 

 

 

<참고문헌>

청와대, 제2차 정상회담 발표문

2007 남북정상회담 공동취재단『50년 금단의 선을 걸어서 넘다(서울: 호미, 2009)

김연철『한반도평화경제공동체구상』 (서울: 새로운사람들, 2007)

노무현 재단, 『NLL의 진실과 노무현의 전략』 (서울: 전자책나무, 2013)

 

 

정영철 전남 여수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고등학교를 마쳤다서울로 상경해 공학을 전공하다 진로를 바꿔 사회학을 공부하였다북한통일평화에 대한 연구가 관심사이며지금은 서강대학교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한반도 평화가 곧 어린이의 미래라는 생각에 어깨동무 평화교육센터에 발을 들여놓고 일하고 있다.